삶의 지도

2023년 11월 4일 토요일.
이번에 글또 9기를 지원하게 되면서 해당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리를 해보고자 쓰게 되었다.

“컴퓨터 학과를 오게 된 이유”

2013년, 19살의 저는 10대에 오디션을 다니며 연예인이 되고자 했던 꿈을 접고 대학을 골라야 했다.
“형이 컴퓨터를 많이 하기도 하고, 조립도 할 줄 아니까… 컴퓨터학과 하나 지원해봐야지!
그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러 학과를 넣었는데 그 중 컴퓨터학과를 오게 될 줄 아무도 몰랐으니 말이다.
2014년 3월, 처음 대학에서 배우는 전공은 어려웠지만 10대 때, 연예인 하겠다며 부모님 속을 썩인 것이 죄송하여 1학년 1학기부터 정말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모든 과제를 다하고, 시험만 쳤을 뿐인데 전공 성적은 상위권에 있었다. 그렇게 장학금도 받다 보니, 컴퓨터 공학에 재미를 느꼈다. 공부만 했을 뿐인데, 장학금까지 받으니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될 것 같았다.
 

유명 기업 실무자들과의 커피챗

3학년 2학기,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데이터 분석, 클라우드 컴퓨팅 등 모든 게 재밌었고, 당시 전교 1등도 해보았고, 논문도 썼지만,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구체적인 미래를 그리기 위해 실무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주변 지인들을 동원하였다. 그렇게 유명 기업 엔지니어와 PM을 알게 되어 서울로 올라가 커피챗을 했다. 그때 들었던 말들 중의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
“누구보다 빠르게 취업을 했던 것이 후회되지 않아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대학원을 가지 않고 곧바로 취업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 수없이 생각했었다. 대학원을 가고 싶었던 이유도 생각하다 보니 그저 신분 세탁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결론이 났고, 어떤 것이 옳은 결정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신입이면서 전문가

2020년 7월, 이전 실무자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빠르게 취직을 하고자 교수님의 추천으로 4학년 1학기만 하고 취업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C#, Java, JavaScript 를 통해 웹, 서버, 윈도우 프로그램 모두 개발하였다. 기초적인 지식이 부족하여 앞서 작성된 코드를 통해 룰을 익히고 원숭이처럼 코드를 짰다.
2020년 12월, 갑자기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파견을 가보고 싶기도 하여서 즐거운 마음으로 창원으로 가게 되었다. 설날까지 오픈을 해야 한다며 회사의 인원 대부분을 동원하여 창원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하게 하였다. 당시 HTML, CSS, jQuery로 웹앱을 개발하였다.
기다리던 오픈하는 설날 당일. 모든 프로덕트에 오류가 너무 많아 실패하게 되었다. 고객 중 한 명이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너희가 그러고도 전문가야?”
그 때 충격을 받았다. 신입이지만 동시에 전문가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개발 도서를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졸업식도 못 가고, 갈리면서 만들었기에 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모든 프로덕트를 리팩토링 완료하고, 일부의 인원을 상주 인원으로 남기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일부의 인원 중에는 내가 있었다.
 

이직의 황금기

파견 이후에 정말 많은 사람이 이직을 선택하였다. 추석까지 하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설날까지 앞당겨진 거라 그 당시 고생을 했던 부장부터 사원까지 퇴사하였다. 당시 경력이 1년도 되지 않았고, 이직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나는 남기로 했다.
그 당시, 나는 파견하면서 만들었던 웹 프로그래밍에 크게 관심을 두게 되었고 상주하면서 “JavaScript Deep Dive” 책을 읽으며 jQueryJavaScript로 조금씩 고쳐보고 있었다. 프로덕트들의 시스템을 수정하면서 코드 몽키로 활동했던 코드의 문제를 발견하였고, 대대적인 리팩토링을 하게 되었다. 코드를 고치면서 JavaScript에 점차 익숙해졌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프런트 엔드를 알게 되어 나의 진로를 정하게 되었고, React를 알게 되었다. React를 처음 사용했을 때 느꼈던 생각은 “코드는 짧아졌는데 왜 이렇게 동작하는지 알 수 없네..” 였다.
클론 코딩을 하면서 사용법에 익숙해졌고 eSports 데이터 분석 회사에 이직하게 되었다. 당시, 스타트업 붐이 일어났고 뉴스에서도 젊은 창업가들이 쏟아져 개발자들의 수요 또한 많이 생겨났다. 네카라쿠배라는 말이 생겨나고 지방과 서울의 연봉이 많게는 1,000만 원 차이가 나던 시절. 모두 서울행 기차를 타기 시작했다.
(이직했는데, 이전 회사 사람들이 대부분 서울에 있었다. 나의 대학 친구들 절반이 넘게 이미 다 서울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어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추리로 문제 해결하는 개발자

2021년 9월, 서울의 좋은 사람들이 있는 회사로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거주는 친구 집 반지하에서 중기청(중소기업 청년 전·월세 보증금 대출)을 구하기 전까지 같이 살기로 하였다. 첫 출근을 하기 전, 회사에서 부사수가 있을 수 있는데 괜찮은지 물었다. 나는 잡부(이것저것 다하던 사람)로 1년의 경험을 가지고 프런트 엔드로 처음 일하는 건데 과연 부사수라는 표현이 옳은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떻게 좋은 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잡부 생활에서 얻은 디버깅 방법을 통해 오류 검출 속도는 누구보다 빠르다고 느꼈고, 오류를 추측해서 수정하는 방식에 익숙했기에 대부분의 일을 추리하여 해결하였다. 추리만으로 오류를 검출하고 일을 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나보다 개발을 잘하는 퍼블리셔

2022년 1월, 회사가 투자를 크게 받고 승승장구하였고, CSS에 약한 나는 퍼블리셔 구직을 회사에 요구했다. (당시를 되돌아보면 퍼블리셔가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요구를 한 것을 보면 프런트 앤드 자격이 없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회사는 더 개발을 잘할 수 있도록 퍼블리셔를 뽑아주었다. 퍼블리셔는 입사할 때, 조건이 있었다.
‘나는 프런트 엔드가 되고 싶다. 프런트 엔드가 어떻게 일하는지 보게 해달라.’
퍼블리셔는 퍼블리셔 직무로 입사했지만, 프런트 앤드일까지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도 퍼블리셔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여 프런트 엔드로 직무가 전환되셨다. 그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셨고 이미 나보다 프런트 앤드 적으로 뛰어나다고 느꼈다. 엄청나게 노력하여서 얻은 실력임을 알면서 동시에 나의 무능함과 부족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연차에 맞지 않는 실력이 너무 한심했지만, 나는 공부를 멈추지 않았음에도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2022년의 한 해가 다 가고 있을 때, 갑작스러운 회사의 경영난으로 많은 사람은 권고사직을 당하였다. 그렇게 프런트 엔드로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나보다 뛰어났던 프런트 앤드 분은 유명 기업에도 이미 면접을 보고 합격한 상태였었어 이직을 하였다. 살아남았다곤 하지만 명예롭진 않았다. 혼자서 남은 프로덕트들을 재정비하였고, 운영이 어려운 프로덕트들은 서비스 종료 소식을 알렸다.
 

“다시 만드는 개발 문화”

2023년에는 많은 변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성장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게 된 해이기도 하다. 혼자가 되었지만 새 프로젝트를 처리하기엔 문제가 없었다. 회사는 더 많은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서 새 프런트 엔드를 뽑으려고 하였다. 나는 급하게 사람을 뽑고 싶지 않았기에 대부분 사람을 탈락시켰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 DM으로 연락이 왔다. 회사에 입사하고 싶은데, 다른 회사에는 이미 붙었으나 eSports에 관심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회사로부터 연락이 없어서 직접 연락을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그분의 이력서를 검토하였다. 이력서에는 이미 같은 도메인의 프로덕트를 만들고 운영 중이었다. 도메인이 안 맞아서 연차만 채우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지원자는 진심인 게 느껴져서 적극 추천하였고, 나의 부사수가 되어주셨다.
이번에는 좋은 개발 문화를 만들어가 보자는 생각으로 메뉴얼을 만들었다. PR 문화와 신기술 도입, 회고 등 다양한 문화를 도입하였고, 가볍게 가져가는 대화의 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부사수 분께서 매우 잘 따라와 주어서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 있었고, 모던한 프런트 앤드 스택을 회사에 적용할 수 있었다.
“가볍게 가져가는 개발 문화”는 많은 것을 도전할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주 1회 프런트 앤드 교육 문화였다. 각자 한 주간 교육하고 싶은 주제를 통해서 프런트 앤드 교육을 하였다. 그리고 코드 칭찬 리뷰는 매우 좋은 협업을 이끌어 낸다고 생각했다. 좋은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동행해 주셔서 부사 수분께 항상 감사하다.

“시니어 프런트 엔드와의 멘토링”

프런트엔드로 활동하면서 대부분 “내가 최고인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부족한 실력으로 다른 곳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멘토링을 받기로 하였다. 비용은 생각보다 과격했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여 지체할 순 없었다. 얼리버드 할인 시스템을 이용하여 가장 저렴하게 3개월 동안 시니어를 만날 준비를 하였다.
2022년 6월, 첫 멘토링을 시작하게 되었고 질문을 받았다.
“컴파일이랑 트랜스파일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나는 얼핏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었다.
“최적화와…”
멘토님께서 한마디 하였다.
“전공자 맞아요?”
지금도 그게 참 충격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시니어를 만나서 수준 높은 교육을 듣고 싶었다. 3개월을 공부가 무색할 만큼 부족했다. 그런데 좋았다. 나를 지적해주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고, 엔도르핀이 미치게 돌았던 것 같다. 매주 한 번씩, 멘토님과 한 시간 멘토링을 통해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멘토링을 함께 하는 동기들에게 매번 멘토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였지만 내가 납작해지면서 돌아왔다. 배운 내용을 매주 새벽까지 정리하였는데 그렇게 늦게 자면서도 더 공부하고 싶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멘토님께서 현업 이슈로 멘토님을 교체하게 되어 아쉬웠다. 2~3주가 지나 새로운 멘토님을 맞이했는데 질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아는 단어를 다 던져보았던 기억이 난다. 새 멘토님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훅훅 찔렀다. 그리고 그 부분을 어떻게 공부하면 좋을지 안내를 해주었다.
“다음부터는 답변 스크립트를 만들어 오세요”
답변 스크립트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설명하기가 쉬워졌다. 의사를 전달할 때, 머릿속에 정리되는 시간이 점점 빨라졌고, 이전보다 깔끔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말할 것인지 정리를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가장 재밌었던 것은 리액트에서 자바스크립트는 어떻게 쓰이고 어떤 개념이 쓰이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주셨을 때이다. 그때, 술의 눈을 마신 것처럼 머리가 시원해졌다. 매주 화요일에 수업을 들을 때마다 매번 잠이 들 수 없었다. 리액트가 주는 개발자 경험이 혁신적으로 느껴졌고, 공부할수록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공부를 재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3년간 모르고 썼던 코드들이 어떻게 동작하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머릿속에 그려지는 경험이 너무 재밌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것을 배우고 있으며 좋은 멘토님을 만나서 날마다 성장을 하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

프런트 앤드 3년 차가 되면서 지금까지 느꼈던 경험은 “프런트 앤드 인식이 왜 이래?” 였다.
많은 현 업자 이야기를 할 때, 자기 회사 프런트 엔드들을 개발자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프런트 엔드들이 무엇을 하느냐고 이야기하는 개발자들도 보았다. 어쩌다 이런 인식이 생겼을까? 스타트업 황금기에 생겨난 수준 낮은 개발자들이 대량으로 현업에 뛰어들었던 때가 생각이 났고, 회사에 이직하게 나도 있었다.
모든 프런트 앤드 개발자들이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닌데 색안경이 존재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내가 이 색안경을 바꿔볼 수 없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토대로 무료 멘토링을 해보았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실력 있는 개발자들을 양성하여 수준 높은 프런트 앤드 문화를 만들고 프런트 앤드 인식 개선을 위해 힘쓰고 싶어졌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사회에 나를 증명해야 할 것이고, 콘퍼런스에서 스피커로 참여해보는 목표가 되었다.
스피커로서 전달한다면 내가 전달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하고 흡입력 있게 만드는 것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번 글또 9기를 통하여 흡입력 있는 글들을 써보고자 지원하게 되었다.